PROLOGUE

빅뱅의 컴백을 앞두고, 태양은 한 장의 솔로 앨범을 먼저 내놓았다. 《QUINTESSENCE》. ‘본질’이라는 뜻을 가진 제목이었다.

태양 정규 앨범 QUINTESSENCE 커버
태양 《QUINTESSENCE》.출처: THEBLACKLABEL

지난 몇 년 동안 태양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음악은 더욱 넓어졌고, 사운드는 더욱 현대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이번 앨범에서 ‘새로운 태양’을 만나게 될 거라고 자연스럽게 기대했다.

Spotify에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첫 곡 <BAD>. 강렬한 비트와 현대적인 프로덕션. ‘아직도 현재형이구나.’

두 번째 곡 <Live Fast Die Slow>. 앨범은 조금 더 넓어졌다. 사운드는 더욱 자유롭고, 장르는 더 이상 태양을 가두지 않았다. ‘이번 앨범은 꽤 새로운 방향이겠는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세 번째 곡. <Would You>. 여기서 모든 예상이 멈췄다.

건반이 먼저 공간을 연다. 태양은 그 공간을 곧바로 채우지 않는다. 숨을 한 번 고른 뒤, 조용히 노래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후렴으로 갈수록 악기는 조금씩 커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사운드는 커지는데, 감정은 오히려 안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머릿속에서 오래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조용필.

나는 재생을 멈췄다. 왜? 왜 지금 조용필이지?

그날 저녁, 나는 <Would You>를 세 번 더 들었다. 다음 날도 다시 들었다. 그래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만 더 선명해졌다.

태양을 듣는데, 왜 조용필이 들렸을까.

YouTube에서 보기
태양 <Would You> (feat. TARZZAN, WOOCHAN) · THE QUINTESSENCE FILM · TAEYANG 공식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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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의 감각

처음에는 보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양과 조용필의 노래를 번갈아 들었다.

태양은 R&B를 기반으로 한 섬세한 보컬리스트이고, 조용필은 록과 팝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발성을 완성한 가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태양의 노래를 들으며 조용필이 떠오르는 구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의 태양은 예전보다 기교를 덜어냈다. 단단한 진성으로 감정을 밀어 올리는 순간이 많아졌고, 그 변화는 목소리의 결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그 지점에서 문득 조용필이 겹쳐 보인다.

두 사람 모두 두성과 비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독특한 톤 컬러를 가지고 있다. 중고역으로 올라갈 때도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음을 길게 끌어올리기보다, 한 번 눌러 압축한 뒤 앞으로 내보내는 느낌이 있다. 특히 ‘이’나 ‘에’ 같은 모음을 처리하는 순간에는 그 결이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보컬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흔히 ‘잡아서 부른다’는 표현을 쓴다. 음을 흘려보내기보다 중심을 단단히 잡은 채 소리를 앞으로 밀어내는 방식이다. 태양과 조용필은 모두 그 감각을 공유한다. 주 음역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놀랄 만큼 비슷한 인상을 남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질문이 생긴다. 창법이 비슷한 가수는 많다. 음역대가 비슷한 가수도 많다. 그런데 왜 나는 수많은 가수들 가운데 조용필을 떠올렸을까.

아마 답은 보컬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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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

그 질문을 붙잡고 며칠을 보낸 뒤, 나는 다시 앨범의 제목을 바라보게 되었다. 《QUINTESSENCE》. ‘본질.’

처음에는 그 제목을 새로운 태양의 선언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사운드. 새로운 장르. 새로운 시도.

하지만 앨범을 반복해서 들을수록, 오히려 정반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앨범은 새로운 태양을 만들려는 작품이 아니었다. 가장 태양다운 태양을 끝까지 밀고 간 작품이었다.

프로덕션은 달라졌다. 사운드는 더 넓어졌다. 표현도 조금씩 변했다. 하지만 오래 귀에 남는 것은 변화가 아니었다. 태양이 오래전부터 노래해온 방식이었다. 사랑을 말하는 방식. 희망을 말하는 방식. 한 사람의 목소리로 끝까지 사람을 설득하려는 방식.

겉은 달라졌지만, 가장 안쪽은 그대로였다.

그 순간, 비로소 《QUINTESSENCE》라는 제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겠다고 자신의 중심을 바꾸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본질을 더욱 밀고 가며 새로운 시대와 계속 대화한다. 그래서 오래도록 현재형이다.

본질을 끝까지 밀고 들어간 사람은, 결국 가장 새로운 사람이 된다.

내가 태양에게서 조용필을 들은 것은 이 두 뮤지션이 음악을 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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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넘어, 하나의 언어

빅뱅의 태양과 조용필은 서로 다른 시대에 데뷔했다. 서로 다른 음악을 만들었고, 서로 다른 무대 위에 섰다. 그런데도 나는 왜 자꾸 두 사람 사이를 오가고 있었을까.

아마도 두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이 결국 같은 언어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한국어가 아니다. 록도 아니고, R&B도 아니며, 발라드도 아니다.

서양에서 건너온 음악의 문법을 빌리면서도,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감정을 끝내 자기 목소리로 노래하는 방식. 새로움을 위해 자신을 바꾸기보다, 자신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함으로써 새로워지는 방식.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듣고 있던 것은 두 명의 뮤지션이 아니었다. 한국 대중음악이 오랜 시간 만들어온 하나의 언어였다.

태양은 오늘의 시대에서 그 언어를 말하고 있었고, 조용필은 자신의 시대에서 같은 언어를 말하고 있었다.

2013년 4월 조용필
조용필, 2013년 4월.ACROFAN · CC BY-SA 3.0 · 원본 유지

그래서 나는 태양을 듣다가 조용필을 만난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다시 만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PILOGUE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득 하나의 무대가 상상되었다. 언젠가 태양이 조용필의 노래를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부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 무대를 듣는 사람들은, 한 명의 가수가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음악 언어가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순간을 들었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QUINTESSENCE》를 들으며 만난 것도,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세대를 건너 이어져 온 하나의 음악 언어였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한국 대중음악의 언어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왜 한국의 대중음악은 서양의 음악을 받아들이면서도 결국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게 되었을까. 그리고 조용필은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다음 글에서는 조용필의 여섯 곡을 따라가며,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 보려 한다.

한국 대중음악은 어떻게 자신의 언어를 만들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