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아침에 다니는 수영장의 물이 흠칫 차갑다. 가을이다. 내가 가을에 태어나서일까, 왠지 쓸쓸한 노래들을 애정한다. 가을 초입의 청명한 하늘과 긴 팔을 꺼내 걸치게 하는 선선한 경쾌함이 아닌, 나뭇잎들이 색이 바래 가면서까지 낙엽으로 떨어지기 싫다고 매달리는 쓸쓸하고 무거운 가을.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멜랑꼴리한 노래들이다. 멜랑꼴리에 대한 수많은 번역이 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번역은 ‘조용한 슬픔’이다. 소망했으나 갖지 못한 것, 이루고자 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 사랑하였으나 사랑받지 못한 기억들 같은 것.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꺼이꺼이 울어댄다면 분명 꼴불견에 못난 놈이 되기 십상이니, 조용히 슬퍼하는 게 문명인으로 살아가는 방편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가을에 태어나서 멜랑꼴리한 노래들을 좋아한다는 건 그냥 갖다 붙인 이유다. 차마 큰 소리로 울지 못하는 어른 남자가 조용히 속으로 울기에 좋은 노래들이 멜랑꼴리한 노래다. 그중 처음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노래는 에코브릿지와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이다.

노래 제목과 첫 소절이 같은 노래들이 있다. 선명하게 주제를 찍으며 노래가 시작되는… 그리고 그 첫 소절을 듣는 순간, ‘아, 난 이 노래를 사랑하겠구나’ 예감하게 되는 노래.

부산에 가면
다시 널 볼 수 있을까

최백호님의 낮은 읊조림을 듣자마자, 난 이미 나고 자란 부산 바닷가에 서서 이 노래를 듣고 있었다. 바닷바람 속에서 고운 머릿결을 흩날리던 그녀를 떠올리며,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피아노 선율 속에 푹 잠겨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사실 난 최백호님의 노래를 즐겨 듣지는 않았다. <낭만에 대하여> 같은 노래를 알고는 있었지만, 뒤풀이 노래방 자리에서 선배가 불콰해진 얼굴로 목청껏 뽑아내던 노래로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에코브릿지가 작곡한 컨템포러리한 선율 위에 얹힌 최백호님의 목소리는 이분이 아니라면 이런 감정을 자아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황홀했다. 마치 크림빵에 파김치를 얹어 먹으면 정말 맛있다는 오마이걸 미미의 얘기처럼, 먹어보기 전에는, 들어보기 전에는 안 믿기는 조합이었다. 처연하고 쓸쓸한 최백호님의 목소리와 감미롭고도 슬픈 에코브릿지의 피아노 선율은 만일 《부산 노스탤지어》라는 영화가 있다면 그 주제곡은 바로 이 노래가 되어야 한다고 믿게 했다. 그 뒤로 최백호라는 가수에게, 그리고 그 목소리에 내가 빠지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알고 보니 최백호님 역시 부산 출신이었다. 그렇게 알고 들으니 더 절절한 노래가 되었다. 아마도 그는 이 노래를 부르며 당신의 부산 그녀를 생각했겠지.

02

그렇게 혼자만의 동지애를 느끼며 지내던 내게 몇 달 전 최백호님과 잠시 인연을 맺을 기회가 찾아왔다. 부산을 기반으로 한 어느 브랜드의 광고를 맡으면서, 부산 출신 연예인들을 모델로 한 캠페인을 제안했다. 사심 반, 전략적 노림수 반. 젊은 타깃을 위한 부산 출신 연예인, 중년을 위한 스타, 장년층을 위한 최백호님을 묶은 아이디어였다. 다행히 광고주는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출연 가능 여부를 타진하자 최백호님이 고사하셨다. 실망하던 차에, 캠페인의 의도와 아이디어를 직접 설명하면 들어보고 다시 판단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모델 에이전시를 통해 알아보니 데뷔 이래 50년(올해가 마침 50주년이란다!) 동안 최백호님은 광고에 단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광고 의뢰는 그냥 고사하지만, 어쩌다 흥미가 생긴 제안은 직접 설명을 들어보고 판단하신다는 거다. 하지만 그마저도 출연으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고 했다.

결전 전날, 나는 마치 광고주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듯 발표 자료를 정성껏 만들었다. 결과는 예측할 수 없었지만, 난 이 아이디어를 반드시 설득하고 싶었고 그렇게 최백호님을 내가 만든 광고에 출연시키고 싶었다. 모 호텔 커피숍에서 아침 일찍 그의 에이전트와 나, 동료들이 먼저 만났다. 잔뜩 긴장한 우리 앞에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무대 위의 카리스마와는 전혀 다르게 노가수는 위엄 있지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광고에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지만, 활동 50주년을 맞아 의미가 있거나 새로운 도전이 될 만한 광고라면 한 번쯤 출연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의 제안을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20여 분의 짧지만 열과 성을 다한 설명을 마치자, 그는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일주일 정도 여유를 달라고 했다.

그렇게 미팅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호텔 커피숍을 나와 근처에서 늦은 식사를 하러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내 폰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받은 전화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백홉니다. 말씀 주신 광고 건 하고 싶습니다.” 헤어진 지 3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알 길은 없었다. 그저 기쁜 마음으로 감사를 전하고, 우리 일행은 대로변에서 다 같이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

그렇게 그가 출연한 광고를 만들었다면 해피 엔딩이었겠지만, 기껏해야 15초 혹은 30초 남짓한 TV 광고 한 편이 완성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광고주의 방향성 변경으로 최백호님이 출연하는 아이디어는 채택되지 않았고, 광고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다. 어렵게 허락한 출연인데 송구한 마음으로 불발 소식을 전했다. 그는 이해한다며 “비즈니스란 게 쉽지 않죠”라고 오히려 나를 다독여줬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함께 대화를 나누며 느낀 그는 온화한 눈매 뒤에 여전히 뜨거운 불꽃을 갖고 있었다. 50주년이 되었으니까 오히려 새로운 도전의 의미가 있다면 해보겠다는 말 속에서, 지금도 계속 새로운 노래를 만들고 에코브릿지와 같은 젊은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며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그의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협업하고 도전한 노래가 내게 와닿았던 것이다.

03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 《기차의 꿈》(Train Dreams)에는 같은 제목의 멋진 노래가 있다. 처음 듣는 순간 <부산에 가면>이 떠올랐다. 찾아보니 호주 출신의 닉 케이브(Nick Cave)가 부르고, 록 밴드 The National의 멤버이자 영화음악 작곡가인 브라이스 데스너(Bryce Dessner)가 음악을 만든 곡이었다. 마치 최백호님과 에코브릿지의 이종명님이 떠오르는 조합. 서정성 깊은 멜로디와 읊조리듯 부르는 닉 케이브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방식이 <부산에 가면> 같았다. 최백호님은 1950년생, 이종명님은 1978년생, 닉 케이브는 1957년생, 브라이스 데스너는 1976년생. 이들도 신구의 협업으로 마음을 울리는 멜랑꼴리한 음악을 완성했다. 닉 케이브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들려온다. 예컨대 《피키 블라인더스》(Peaky Blinders)의 대표적인 테마곡 <Red Right Hand> 역시 그의 노래다. 거친 남자의 목소리로 갱스터 드라마의 분위기를 만들지만, 난 역시 닉 케이브가 최백호님처럼 상실을 노래할 때 가장 좋다. 그가 직접 가사를 쓴 <Train Dreams>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사가 전하는 상실감 같은.

Years and years and years and years and years and I can't begin to tell you how that feels.

목소리가 악기인 사람을 가수라 한다지. 어떤 목소리엔 인생이 보인다. 그런 목소리는 듣는 순간 우릴 인생의 어떤 장면으로 데려간다. 최백호라는 가수의 목소리가, 닉 케이브라는 가수의 목소리가 그렇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실린 좋은 노래를 만나면 한없이 멜랑꼴리해져 속으로 꺼이꺼이 울게 되는 것이다. 물론, 겉으론 태연한 척하며.

TRACK 01

에코브릿지 with 최백호 — <부산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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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브릿지 with 최백호 — <부산에 가면> · 공식 MV
TRACK 02

Nick Cave — <Train 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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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k Cave — <Train Dreams> · 공식 MV
BONUS TRACK

Nick Cave & The Bad Seeds — <Red Right 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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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k Cave & The Bad Seeds — <Red Right Hand> · 공식 M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