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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가 만든 단발머리

TV에서 어린이 명작동화 말고도 다른 프로그램이 나온다는 걸 막 알아가던 무렵,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단발머리>를 열창하는 조용필을 봤다. 그때 나는 겨우 유치원생이었다.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받은 나는 그 노래의 뮤즈가 되고 싶은 마음에 즉시 엄마를 졸라 여자아이들의 로망인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기어이 인증샷도 남겼다. 그렇게 단발머리를 하고 <단발머리>를 부르러 다니는, 세상 가장 조숙한 유치원생이 되었다.

가끔 엄마 집에 가면 옛 사진첩을 뒤지는데, 사진 속에는 뭔가 살짝 마음에 들지 않는 머리 스타일을 어색해하면서도, 어딘가 뿌듯해 보이는 유치원생이 있다. 볼 때마다 피식 웃게 된다.

1980년대 초반 옷차림의 단발머리 여자 유치원생을 표현한 AI 생성 이미지
단발머리를 한 유치원생. 원고의 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미지.AI 생성 이미지 · 실제 작가 사진 아님

한글을 꽤 빨리 깨우친 나는 팬레터도 썼던 것 같다. 엄마의 증언에 의하면 ‘조용필 오빠에게’로 시작되는 뭔가를 써서 엄마한테 자주 보내달라고 졸랐다는데, 부모님 입장에서는 거의 또래 친구뻘인 조용필에게 딸이 오빠라고 하면서 편지를 쓰니 어이가 없었을 만도 하다.

<단발머리> 이후 조용필 ‘오빠’의 거의 모든 노래를 외우고 다녔고, 그렇게 나의 가요 사랑은 시작되었다.

YouTube에서 재생
조용필 <단발머리> · 울산MBC 공식 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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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로의 인도

국민학생이 된 이후로도 여전히 조용필은 나의 최애였지만, 학교생활이 시작되면서 조금씩 TV 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 무렵 우연히 내 눈에 쏙 들어온 건 TV나 큰 라디오 없이도 늘 들고 다닐 수 있는 것, 삼성에서 나온 마이마이라는 포터블 카세트 플레이어였다. 생일선물로 만 1년을 졸랐던 것 같다.

그렇게 생일선물 약속을 받아냈을 때쯤, 잊을 수 없는 CM을 만나게 된다. 삼성의 라이벌인 금성(지금의 LG)이 내놓은 아하 카세트 플레이어 광고였다. 그리고 그 광고의 CM은 조용필의 <미지의 세계>였다. 일렉기타의 클라이맥스에서 신디사이저로 넘어가는 부분을 하이라이트로 쓰는데, 이 부분이 소름 끼치게 좋았다.

문제는 이미 삼성 마이마이를 사기로 마음먹고 있었다는 것. 게다가 금성의 아하는 네모난 모양에 빨간색이라 외관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미지의 세계>를 듣고 마음이 바뀌었다. 결국 나는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마이마이를 버리고 아하를 사고야 만다.

검은색 전면 창과 빨간색 몸체를 가진 금성 아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금성 아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Photo used with permission

아하로 듣는 모든 음악이 <미지의 세계>와 같은 감동을 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하를 받은 이후 라디오 방송을 본격적으로 듣게 되었고, 결국 <미지의 세계>는 막 10대에 들어선 나를 무한한 음악의 세계로 이끌었다.

<미지의 세계>가 실린 《조용필 7집》은 지금도 내 인생 음반 순위에서 단연 1위다. 수록곡 하나하나가 40년이라는 세월을 가뿐히 뛰어넘을 만큼 세련됐고, 조용필의 밴드 위대한 탄생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사운드와 조화를 이룬다. 당시 위대한 탄생에는 송홍섭, 김광민, 유재하가 있었다. 7집에 실린 <사랑하기 때문에>를 작사·작곡한 유재하의 연주 모습도 볼 수 있다.

YouTube에서 재생
조용필 <미지의 세계> · KBS 나이트쇼 · 1985.05.04
EPILOGUE

겨우 유치원생이던 나의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국민학생이 되어서는 그렇게 갖고 싶던 인생 첫 카세트 플레이어까지 바꾸게 했던 그 ‘오빠’. 어린 시절에는 그저 조용필 ‘오빠’가 좋아서 듣기 시작한 음악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음악 안에 있던 수많은 음악가와 소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 인생 최초의 아이돌 조용필은 그렇게 내 취향을 확장시켜주었고, 폭넓게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